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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희-흐린 풍경속으로 걸어가다


안경을 쓴 나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우선적으로 그 안경을 눈여겨보는 편이다.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안경들이 우산처럼 떠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저마다 자신의 감각과 취향, 혹은 자기를 드러내는 안경 하나씩을 걸치고 그 너머로 세상을 '빤히' 들여다볼 것이다. 임춘희를 생각하면 매우 작은 안경과 역시 작고 장난스런 얼굴과 그림이 동시에 불거진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세상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대거나 온갖 상상력을 연기처럼 피워낸다. 가득한 연기로 눈이 매워 올 때면 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상상력과 감정의 동요로 지친 눈이 뿌옇게 흐려지고 화면도 그렇게 희뿌연히 문질러지면 황망했던 마음과 그 마음의 부산함을 질료화시키고자 애썼던 손들도 잠시 결정을 미루고 이상한 분위기 아래 문득 서있을 것이다. 감정 또한 고드름처럼 매달려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숨쉬는 이 세상,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들에 무한한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내던 임춘희의 근작은 그 감정과 상상력이 보다 융숭해졌고 부드러워졌다. 합판과 장지, 캔버스 표면에 칠해진 물감/색들은 불분명한 사물의 외곽을 거느리면서 희미하고 뿌옇다. 날카로운 윤곽이란 죄다 지워지고 흐물거리고 있어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자연계에 경계는 없다.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풀들은 경계를 삼키고 특정한 형상을 짓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변화해갈 뿐이다. 고정된 색채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알 것 같다가도 도통 모를 뿐이다. 물감을 머금은 붓질이 화면위에 감각적으로 문질러진다. 둥근 유선형의 형상들이 조금씩 발아하고 햇살에 녹아내리는 녹색이 아늑하다. 초록으로 가득 흐린 풍경 속에 알 수 없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출몰한다. 그림 속에는 풀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산들은 웅크린 순한 짐승들 마냥 걸어다니고 융기하며 그 사이로 사람들이 서있거나 엎드려있는가 하면 순간 파도가 되고 바다가 되다 깍지 낀 손가락 마디를 커다랗게 보여준다. 부풀어 오르는 빵 같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 같은 산들은 이미지의 보고이자 상상력의 원천으로 수북하고 넘친다. 커다랗고 길게 누운 인물은 여전히 그녀 그림의 독특한 표식으로 등장한다. 크고 두툼한 팔들이 산을 껴안고 헤엄친다. 두 사람이 물속에 잠겨있다. 혹은 등을 보이는 여자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산과 나무와 달, 태양을 바라본다.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이자 세계이며 작가 자신이자 그와 동행하고 있는 이다. 작가는 자기 앞의 자연을 보고 그 자연에 깃든 이런저런 형상들을 즐겁게 상상하고(자연에서 닮은꼴을 찾는 인간의 눈은 이미지의 근원을 알려준다)조용히 그 형상에 이름을 지어주고, 내면으로 불러들여 삭힌 후에 건져올려 그림으로 그려낸다. 자연은 자기감정과 닮아있다! 자연은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응시하다보면 얼마나 다채롭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임춘희는 늘 그 자연/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산은 모든 것을 죄다 품고 있어 넉넉하고 인자하며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형상과 색채를 선사한다. 그래서 동양인들은 산을 어질다(仁)고 인식했다. 덕은 인자하고 차별이 없다. 자연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이들은 그토록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자연 앞에서 아득하고 망연할 것이다. 임춘희의 눈이 뿌예지고 손들이 결정을 못 내리며 주춤하는 이유도 자연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과 작가의 긴장은 탱탱해진다. 자연으로 마냥 끌려가면 작가는 필패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권투장갑을 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응원을 받으며 덤덤히 길을 가는 자신의 모습(복서)을 그려놓았다.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의 비장한 마음을 지니고 자연 안에 꿈틀거리는 것을 실눈으로 담아 그려나가고자 한다. 꿈꾸는 주먹!

그녀가 마석으로 거처를 옮긴 후 만나게 된 이 그림들은 '환경의 변화가 한 화가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주제를 떠올릴 만큼 변했다. 온통 기이한 침묵과 변화무쌍한 자연에 둘러싸여 앞산을 올려보거나 나무와 풀과 새소리 안에서 은거하는 삶은 자연스레 그림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얼마 전 신하순의 작업실을 가는 길에 임춘희의 작업실 근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주변 자연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깊고 오묘했던 기억이 새롭다. 산이 있는 풍경이 일상의 공간이 되다보니 자연스레 화면에 자연이 물처럼 스몄다. 몇 겹으로 쌓인 산들은 그 안에 "요지경 속 세상처럼 갖가지 것들로 채워져 꿈틀대고"(작가노트)있고 해서 그 재미나게 변해가는 형상을 작가는 부지런히 따라간다. 그녀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한다. 풍경은 의인화되어 작가에게 말을 건네고 현재의 자기감정이 되고 보고 싶은 것들을 죄다 보여주고 그런가하면 이내 모든 것을 지우기를 반복한다. 하늘과 산, 나무와 작가(감정)는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그래서일까 이전 작업에 비해 자연이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섰고 그만큼 서사적이며 자연과 자신이 하나로 등장한다. 자연과 함께 나눈 대화가 그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에 하나씩 붙은 제목이 재미있다. 그림은 조금 무겁고 서늘하고 진지해보이지만 제목들은 그녀의 말투를 닮아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이 기우뚱한 불균형, 금이 간 조화가 그림 그리는 일이고 사는 일이며 다름 아닌 예술가의 일상임을 들려준다. 그런 여유와 유머가 임춘희의 안경 안에서 빛난다. 그 빛들이 불러모은 것이 그녀의 그림이다.


박영택 / 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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